[특별기획: 쿠팡 패러독스 ②] 3천 원 티셔츠의 공습... 쿠팡, 중국발 '가격 쓰나미'와 맞서다
특별취재팀
yheo@fransight.kr | 2025-12-02 16:31:13
"가격 경쟁은 포기"... 쿠팡, 품질·브랜드 무기로 생존 전략 전환
[프랜사이트 = 특별취재팀 박세현·허양 기자]
쿠팡이 지난 10년간 국내 오프라인 유통 강자들을 제압하며 '로켓배송'의 신화를 썼다면, 이제는 국경을 넘어선 거대한 적과 마주하게 됐다. 2024년과 2025년을 관통하는 한국 유통 시장의 최대 화두는 단연 'C-커머스(차이나 이커머스)'의 파상공세다.
압도적인 가격 경쟁력과 빨라진 배송 속도로 무장한 테무(TEMU)와 알리익스프레스(AliExpress) 등 중국 플랫폼의 상륙은 한국 이커머스 지형도를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쿠팡은 이제 네이버나 신세계 같은 국내 기업이 아닌, 글로벌 제조 공급망을 장악한 중국 유통 공룡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72시간 배송, 직구의 상식을 깨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해외 직구는 '잊을 만하면 도착하는' 인내심의 영역이었다. 배송에 2주는 기본, 한 달 걸리는 것도 예사였다. 하지만 2024년 말부터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글로벌 시장에서 초저가 전략으로 급성장한 테무는 한국 시장 공략에 사활을 걸고 배송 속도 단축에 나섰다. 과거 8~12일 걸리던 배송은 중국 광둥·저장 지역 제조 공장과 항공 운송, 한국 통관 시스템 최적화를 통해 5~8일로 줄었다. 최근에는 일부 카테고리에서 '72시간 배송'이라는 파격적인 실험까지 진행 중이다.
3일이면 중국에서 한국까지 물건이 도착한다. 이는 쿠팡이 자랑하는 '익일 배송'에 근접하는 속도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가격은 훨씬 저렴하면서 배송은 3일 내 도착하는 중국 플랫폼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국경 간 이동임에도 '직구'를 '내수 쇼핑'처럼 느끼게 만든 것이다.
신선식품까지 노리는 알리프레쉬
더 위협적인 움직임은 2025년 초부터 감지됐다. 공산품에 국한됐던 중국 플랫폼의 공세가 이제는 쿠팡의 핵심 영역인 '신선식품'으로 확장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알리바바는 중국 내에서 성공시킨 신선식품 브랜드 '허마셴성'의 운영 노하우를 한국 시장에 이식하는 테스트를 진행 중이다. 이른바 '알리프레쉬' 프로젝트다.
한국은 인구밀도가 높고 콜드체인 인프라가 잘 갖춰져 신선식품 배송 효율이 세계적으로 높은 시장이다. 막대한 자본력을 앞세운 알리프레쉬가 본격 서비스를 시작하면 쿠팡프레시를 비롯해 마켓컬리, SSG Fresh 등 국내 새벽배송 업체들은 치명적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공산품에서 시작된 가격 전쟁이 식탁 물가 경쟁으로 번지는 건 시간문제다.
3천 원 티셔츠의 비밀
중국 플랫폼이 내세우는 '초저가'의 비밀은 무엇일까. 핵심은 유통 마진을 극한으로 줄인 '수직 통합' 모델이다.
기존의 복잡한 유통 단계를 거치지 않고, 중국 현지 제조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이 플랫폼을 통해 소비자에게 직배송된다. 중간 도매상이나 수입상이 가져가던 마진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그 결과는 놀랍다. 스마트폰 액세서리, 생활용품, 미용 제품의 가격이 국내 시중가의 30~60% 수준으로 떨어졌다. 3천 원짜리 티셔츠, 5천 원짜리 무선 이어폰이 등장했다. 소비자에게는 축복이지만, 국내 업계에는 재앙이다.
테무의 본격 확장 이후 동대문 패션 상권과 국내 중소 셀러들의 매출 하락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소상공인과 프랜차이즈 업계는 원부자재 조달 비용 변동성과 가격 경쟁력 상실이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정부의 고심, 규제 카드 만지작
이런 급격한 변화에 정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재 정부는 중국 플랫폼의 초저가 공세가 관세 및 부가세 면제 혜택(해외 직구 150달러 이하 면세)에 기인한다고 보고 면세 기준 조정을 검토 중이다.
간이통관 기준 강화와 수입 물품에 대한 품질 표시 의무화 등 비관세 장벽을 높이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 국내 유통 생태계를 보호하고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겠다는 의도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소비자 후생이 저하되고 통상 마찰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다. 설령 제도가 개편되더라도 이미 구축된 중국 플랫폼의 물류 네트워크와 가격 우위를 완전히 상쇄하기는 어렵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쿠팡의 선택: 가격이 아닌 브랜드로
전례 없는 위기 속에서 쿠팡은 전략을 수정했다. 중국 플랜폼과 직접적인 '가격 출혈 경쟁'을 벌이는 건 승산이 없다는 판단이다. 대신 광고, 멤버십, 콘텐츠, 자체 브랜드(PB)를 중심으로 전선을 이동시키고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PB 사업의 고도화다. 쿠팡은 '탐사', '코멧' 등 기존 PB 브랜드를 단순한 가성비 제품이 아닌 품질이 보장된 브랜드로 격상시키려 하고 있다.
이는 중국산 초저가 제품의 고질적 문제인 '품질 불량'과 '가품 이슈'를 파고드는 전략이다. 쿠팡은 물류비 비중을 낮추고 공급망을 안정화하기 위해 PB 라인업을 확대하는 한편, 국내 생산자와 직접 계약하는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구조를 늘려가고 있다.
'메이드 인 코리아'의 품질 신뢰도를 확보하고, 중국 플랫폼의 공습에 맞서 국내 제조 생태계를 우군으로 삼으려는 포석이다.
쿠팡의 또 다른 무기, 멤버십
쿠팡의 두 번째 방어선은 와우 멤버십이다. 월 7,89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무제한 무료배송, OTT 서비스, 쿠팡이츠 할인 등 다양한 혜택을 묶어 고객 충성도를 높이고 있다.
중국 플랫폼이 아무리 싸도 배송비를 따로 내야 하거나 최소 주문 금액이 있다면, 와우 멤버십 가입자들은 쿠팡을 먼저 찾게 된다. 한 번 가입하면 쉽게 떠나지 않는 '락인 효과'를 노린 것이다.
실제로 쿠팡의 2024년 4분기 실적 보고서를 보면, 와우 멤버십 가입자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이들의 평균 구매액은 비회원 대비 3배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품질 vs 가격, 소비자의 선택은?
결국 승부처는 소비자의 선택이다. 3천 원짜리 티셔츠를 살 것인가, 품질을 믿을 수 있는 1만 5천 원짜리 국내 브랜드를 살 것인가.
초기에는 가격에 이끌려 중국 플랫폼을 이용하던 소비자들도 불량품을 받거나 반품이 어려운 경험을 하면서 다시 쿠팡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쿠팡은 바로 이 지점을 공략하고 있다.
빠른 배송, 쉬운 반품, 친절한 고객 서비스. 지난 10년간 쌓아온 신뢰와 편의성이 쿠팡의 최후 방어선이다.
생존을 건 2차 대전의 시작
'한국형 아마존'을 꿈꾸던 쿠팡은 이제 '글로벌 제조 공장'인 중국 플랫폼들과의 전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새로운 과제를 떠안았다.
소비자는 더 싸고 더 빠른 것을 선택한다. 쿠팡이 과연 중국발 '가격 파괴'의 쓰나미 속에서 자신만의 '프리미엄'과 '신뢰'를 지켜낼 수 있을지, 한국 유통 시장의 운명이 걸린 제2차 대전의 막이 올랐다.
전장은 더 이상 국내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제는 글로벌 공급망을 장악한 중국 거인들과의 싸움이다. 쿠팡이 만들어온 '익일 배송'의 신화가 '72시간 배송'과 '초저가'라는 새로운 기준 앞에서 어떻게 진화할지, 대한민국 유통의 미래가 이 싸움에 달렸다.
다음 편 예고: 3부에서는 1,600억 원대 과징금과 3,370만 명 개인정보 유출 사태를 중심으로 쿠팡이 직면한 법적·윤리적 위기와 플랫폼 자본주의의 그림자를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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